<퀼트>퀼트의 역사 알아보기 4
영국에서 건너온 청교도들은 주로 오늘날의 뉴 잉글랜드에 터를 잡고 그 후에 미국으로 건너온 스웨덴인, 독일인은 펜실바니아에 거주하게 되었다. 네들란드인과 영국인은 뉴욕에, 프랑스인은 주로 남부로 모여 글었지만 퀼트는 그들 모국의 각각 다른 영양을 받으면서도 점차 미국적인 것으로 그 모습을 갗추어 가게 되었다.
초기 퀼트는 작은 천을 패치워크 한 것과 린지울시(가로실이 마이고 세로실을 울인 천) 민무늬의 면 등으로 만들어졌다. 식민지 시대에는 여성 교육에서 읽기, 쓰기, 셈하기 같은 능력보다는 가사 일체를 포함한 훈련을 보다 중요시 여겼다. 가정을 꾸미고 살아가려면 옷가지며 생활 필수품을 자신의 손으로 만들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간혹 하녀들을 쓴다 하더라도 바느질 같은 가사를 스스로 할 수 있어야 했던 것이다. 바느질은 아에 배구기 시작해 패치워크는 물론 포패치, 나인패치 까지 배웠다. 뉴욕에서는 10세 어린이들을 위한 퀼트 콘테스트가 있었단다. 거기에서 우승한 사람에게 장학금까지 주었다고 한다. 검소와 절약정신을 중시 했던 미국인들에게 퀼트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퀼트>퀼트의 역사 알아보기 5
1860년대 미국 남부로 이주한 사람들 중에는 부자가 많았고, 남부는 프랑스의 영양을 많이 받던 터라 수입천을 비롯해 캐리코, 친쯔, 벨벳 등으로 아름다운 퀼트를 만들었다고 한다. 인도에서 영국으로 수입된 평직목화인 캐리코는 퀼트에 가장 적합한 천이다. 색이 바라지도 않도록 프린트 한 다음 각 문양마다 디자인 등록을 하여 다시 미국으로 수출하게 된다.
영구은 면을 원했기 때문에 식민지인 미국 비지니아에 목화농장을 만들고, 노예 노동을 이용해 면 재배 개발을 시작한다. 1743년 미국에서 영국제 진쯔는 10야드당 23달러로 본국의 4배나 되는 가격이였단다. 그리고 영국은 그 외에 모든 일용품에 중과세를 붙여 독점판매권을 취해 이득을 남기죠.
산업혁명 이후 원면의 광대한 생산지로 등장한 미국으로선 영국의 목화 식민지 지배로부터 가능한 빨리 독립할 필요를 느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실 이미 그 거대한 역사 수레바퀴가 돌아가고 있었어요. 1640년 이미 메사츄세츠에서는 각 가정에서 울을 만들게 하고 마 재배를 의무로 규정지어 직기를 싸게 파는 등 직물의 자급자족을 잘려하려고 했다. 양 사육을 장려하고 각 가정에서 직물 생산에 관한 할당량까지 부과했을 정도였다. 미국이 중요한 시장의 하나 였던 영국에서 가만이 있지 않았겠죠. 미국이 자랍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영국에서는 1654년 식민지에 양 중 암컷 수출을 금지하고 양을 밀수 할 경우 가혹한 처벌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밀수한 양은 바다에 퐁당~
그렇지만 미국이 지금 자급 생산에 박차를 가하게 된것도 따지고 보면 이 지독한 영국의 규제 덕일 지 몰라요. 미인국들의 애국심을 자극하게 되었다. 가는 곳 마다 영국인들로부터 수입훔을 사는 것이 규제되고 국산을 사용하자는 벽보가 나 붙지요.
국산품을 애용하자는 운동의 일환으로 1781년에는 보스톤에 방적학교가 생기고 1725년에는 메인, 로드 아일랜드, 버지니아 등에서도 섬유산업이 유망직종이었어요. 1733년에는 벤자민 프랭클린의 격려를 받으며 미국 펜실바니아로 이주한 영국인 코튼 프린터 존 휴슨이 200파운드를 무이자로 대부받아 펜실 바니아에 염색공장을 설립하기에 이릅니다.
미국 텍스타일의 아버지라 불리는 그는 훗날 '아크라이트 방적기'를 재현시킨 '새슈엘 슬레이터'와 더불어 미국 텍스타일의 역사에 영원히 그 이름을 남기게되었죠. 실제로 그의 작품중 몇 점은 지금도 남아 필라델피아 미술관, 워싱턴 저 미술관,신시니티 미술관 등 미국의 유명한 미술관들에 소장되어 있다고 하네요. 미국 독립 선언문의 기초를 작성했던 '벤쟈민 프랭클린'은 보스톤에 살 당시 여동생이 가장 원했던 다용도 테이블 대신 직기를 보냈다고해요. 훌륭한 주부가 되기 위해서는 다용도 테이블보다 직기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오라비의 세심한 배려였던거죠.
이런 정신들이 씨앗이 되어 결국 1752년에는 목판 프린트에서 동판 프린트로 발달해 가게 되었답니다
<퀼트>퀼트의 역사 알아보기 6
미국에서 최초로 발전한 산업이 바로 면 산업이었어요. 그러니까 오늘날의 경제대국인 미국은 면으로 부를 쌓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1793년에 미국에서 발명된 코튼진, 즉 목화씨를 분리하는 면조기는 면의나라로 미국을 약진시켰어요.
19세기 중엽의 멕시코 전쟁이나 20세기 중반의 남북전쟁도 사실은 목화 토지와 중요하 관계를 갖고있죠. 하지만 세상에 공짜가 어디있겠어요. "동경의 목화", "자립을 상징하는 목화"가 미국에서 양산되기까지도 세월이 그냥흐른건 아니였죠. 이제, 퀼트 작업의 배경이 되는 목화이야기를 좀 더 해볼까요?
1769년 영국에서는" 리차드 아크라이트"가 물레방아를 이용해서 움직이는 방적기계를 최초로 발명하게 되었데요. 지금 본다면 이것 역시 원시적인 것이겠지만 당시로선 획기적인 일이었겠죠. 종래의 수공업에서 기계화된 방적산업을 확립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 테니까요. 영국엔 좋은 일, 세계 방적마켓을 한손에 거머쥐게 되었으니까요. 그 기술을 해외로 유출시키지 않은 것은 물론 우수한 방적공의 미국 이민조차 허가 하지않았다니... 당시 영국인들의 욕심을 알만하네요.
그러니 미국에서는 이 기계가 얼마나 탐이 났겠어요. 미국에선 살그머니 이 기계를 입수해 분해한 다음 프랑스로 보내고 프랑스에선 분해한 부분들을 농기구인 것처럼 , 혹은 고장난 물건들 속에 섞어 미국으로 보내고 , 이렇게 애를 써보았지만 그 무렵엔 끝내 조립에 성공하진 못했다고해요 하지만 '뉴 잉글랜드'의 방적업은 조금씩 조금씩 번영해 갔습니다. 1787년 "존 가포드"는 메사추세츠주의 비버리에 최초의 방적공장을 세웠고, 1789년 " 존 워싱턴""은 대통령 취임 여행중에 이 방적공장을 방문해 격려해 주게 되었던 거에요.
<퀼트>퀼트의 역사 알아보기7
퀼트가 언제 어디에서 생겨나게 되었는지 정확히는 알수 없지만 기원 전 3400년 경 이집트인의 작은 천이나 기원 전 1세기에 만들어진 중국의 퀼트 방석이 발견되었다고 하니까 추위를 막기위해 천을 이어만든 원시 퀼트(?)의 역사가 오래 된 것만은 확실한 셈이죠.
중세에는 패치워크하여 만든 가운을 수 있는 퀼트 침대이불로서 현재 남아있는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14세기에 만들어진 "사실리안 퀼트"에요. 이것은 유명한 서성직자들이 입었고, 갑옷단에 퀼트된 속옷을 무사가 입었다고 해요. 또 십자군기도 패치워크로 만들어 졌지요. 그러나 우리가 본격적인 퀼트라고 말할 사시 < 트리스탄과 이졸데 >의 이야기를 흰색과 갈색의 마실로 퀼팅한 것으로 런던의 빅토리아 앤드 알버트 박물관에 소장되어있죠. 영국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현재 가장 오래된 퀼트는 "리벤홀 퀼트"로 ,커텐으로 사용되던 것이라고 해요.
17세기 경부터 퀼트는 점차 장식적으로 되어, 18세기 초에는 그 화려함이 절정에 이르렀다지요. 꽃장식이나, 나뭇잎 ,당초무늬 등 손이 많이 가는 장식이 여성용 패치코트나 가운 등에 만들어 졌고, 남성용 자켓이나 베스트 등에도 퀼트 자수가 수놓아졌다고해요. 그 후 비단에 금 ,은실로 호화롭게 수를 놓은 퀼트 침대이불도 만들어지게 되었구요. 화려함을 이야기할때 떠오르는 사람이 있죠.
바로, 프랑스 혁명 당시 낭비와 사치가 심해 비난 받았던 "마리 앙뜨와네뜨" 사치스럽긴 했지만 아름답고 우아했던 여인으로 역사에 남은 그녀의 결혼용 사덴 침대이불은 어머니 "마리아 테레사"의 시녀들에 의해 8년간 만들어진 것이라고 해요. 섬세한 자수와 아플리케로 만들어 졌을 그 침대이불을 한번 보고싶지 않으세요? 마지막으로 미국의 퀼트를 이야기 하지 않을수 없겠군요. 여러가지 시도를 반복하면서 오늘날 퀼트를 아름다운 "포크 아트 (folk art)로 발전시킨 사람들은 바로 미국인들이니까요. 미국의 "피스트 퀼트"로 가장 오래된 작품은 1704년 "사라 세드 위크 레베트"와 딸 "엘리자베스"가 만든 기하학 모양의 "벨벳 퀼트"라고 합니다. 그 퀼트 안에는 패턴 종이로 사용된 1701년 "하버드 대학 요람"이 그대로 배접되어 있다는군요.